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씨 몰살 (문단 편집) == 처형된 왕씨 숫자 ==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 없는 추가 숙청을 제외하고 강화도, 삼척, 거제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숫자는 아이 포함 개성 왕씨 남성 135명이다. 1. 조선 건국에 협력한 왕승 일가 2. 이성계 및 조선 건국 세력과 혼맥으로 이어진 왕우 일가 3. 여성 4. 방계 이들을 제외하고 직계 남성들 '''130여명이 제거'''되었다. 후술할 희생자 명부에 '왕씨쌍생소아'(王氏雙生小兒), '소아'(小兒)같은 기술이 있어 유력 왕씨 남성이라면 나이 구분을 두지 않고 제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연구한 사람은 재미 한국사학자 유진 박 펜실베니아대 교수이다.[[https://www.amazon.com/Genealogy-Dissent-Progeny-Fallen-Royals/dp/1503602087|#]] 박 교수는 강화도, 거제도, 삼척 등지에서 일어난 제거 작업으로 희생된 '''희생자 규모를 135명으로 규명했다.''' 이는 당시 희생당한 인물의 원혼을 빌기 위해 작성된 <제문>에 근거했는데 실제로도 공양왕 직계를 포함해 고려 말 왕위 계승권에 근접한 왕씨 '남성'을 중심으로 제거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여인들과 방계 왕씨, 조선 개국 세력과 혼맥으로 얽혀 있는 인물은 숙청에서 제외되었다. 유진 박 교수가 참조한 사료는 18세기 문인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의 문집인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전문이 옮겨져 있는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혼기(魂記)>다.[* 성해응, 《연경재전집》 <외집> 권37 <동학사혼기석>(東學寺魂記釋)] 공주는 왕씨에게 특별한 장소인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이성계가 사돈 왕우와 나란히 거론하며 숙청 대상에서 제외시킨 순흥군 왕승의 아들 왕강을 제거하라는 중신들의 요청을 거부한 이성계가 왕강과 아우 왕휴 등을 귀양보낸 고장이며, 왕승의 사위이자 태종 이방원의 스승으로 왕자의 난때 태종에게 협력해 공신 반열에 오른 [[우현보]]의 아들 우홍부의 연고지이다. 공주 동학사에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위패를 모신 삼은각(三隱閣)이 자리잡고 있는데 1394년 길재가 고려 국왕과 정몽주를 제향하며 건립되었다. 이 <혼기>의 존재 자체는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뒤쪽에 실린 계유정난 희생자들의 명단과는 대조적으로 앞에 실린 왕씨 희생자들의 명단은 거제도와 강화도로 나누어 죽거나 귀양간 이들의 명단을 상세히 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조명받지 못했다. 조선 제19대 숙종 시기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시키면서 부딪친 딜레마는 세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조선 전기에 가장 중요한 임금중 한 명인 세조를 부정할순 없고, 단종과 사육신도 포기할수 없었던 유학자들은 세조의 비도덕적 행위를 어떻게든 묻어버리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데 그중 하나가 공주 동학사의 <초혼기>다. 세조 3년 9월 세조가 공주 계룡산 동학사에 거동하게 되었는데 그곳 중들이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명단을 적은 <초혼기>(招魂記)를 써서 넋들을 위로하고 있음을 보고 불쌍히 여겨 직접 제수를 마련해 단종과 단종 충신들을 추모하며 초혼제를 지냈다는 이야기였다. 공주 동학사 이야기는 당대 무척 널리 퍼졌던 지어낸 이야기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대신들이 언급하는가하면(《숙종실록》 권 63, 45년 4월 30일, -행판중추부사 이이명의 언급-), 당대 최고의 거유 송시열의 《송자대전》(권 193 <墓表> -高麗典書朴公墓表-), 정조 15년 단종릉인 장릉에 배식단을 설치하며 정조가 내린 교서에서 배식단 설치의 전례로 동학사가 언급되며, 일제강점기에 동학사에 얽힌 전승과 사적을 정리한 송주헌의 《동학지》(東鶴誌)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물론 세조가 이들을 추모했다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세조 3년 7월에 세조는 귀양가서 일을 꾸미다가 발각된 금성대군을 사사하느라 바쁜 정국을 보냈고, 9월에는 맏이인 의경세자가 사망하는 흉액을 겪었다. 한가하게 공주로 나들이할 일이 없었다. 세조 12년에 고성 탕정에 피부병을 치료할겸 해서 간적은 있으나 고성-강릉-오대산-횡성-원주을 거쳤지 계룡산에 가지는 않았다. 지방 야사를 유학자들이 주워섬겨서 역사로 빚어낸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간적이 없을 뿐 죽은 이들의 이름을 적은 <초혼기>와 제사는 존재했다. 제16대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의 아들이자 제14대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은 인조 20년(1642) 심희세가 간행한 성삼문의 문집 《성근보집서》의 <서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흔쾌히 받아들인 신익성은 일찍이 동학사의 <사부>(死簿)를 보고 성삼문과 가족들이 모두 해를 입었음을 알았으니, 명 성조 영락제가 혜종 [[건문제]]의 충신이었던 방효유의 10족을 멸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써주었다. 제21대 영조 44년(1768)에 간행된 하위지의 문집 《단계유고》(丹溪遺稿)의 <부록>(附錄)에서도 <동학사 초혼기>를 인용해 41인의 희생자를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제22대 정조때 규장감 검서관 성해응이 등장한다. 연경재 성해응은 정조 12년(1788)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왕명을 받은 각종 편찬작업에 투입되었다. 단종의 충신들을 배향한 장릉 배식단과 《배식록》은 정조 15년에 완성되었으며, 노비에 무당까지 총망라해 단종에게 충성한 이들을 추렸다. 규장각에서는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는데, 성해응도 이에 참여하여 공주 동학사의 <초혼기>를 조사했으며, 13장으로 구성된 <초혼기> 전문을 인용하고 해설한 글이 그의 문집 《연경재전집》에 남아 지금까지 전한다. '''이 <초혼기>는 역대 고려 왕과 태조 3년에 죽은 개성 왕씨들을 한 명, 한 명 언급하며 시작한다.''' 어떻게 된 사연인가 하니 태조 3년 4월에 삼척, 강화, 거제에 보내놓은 왕씨 직계 남성들이 죽자 이듬해 태조는 죽은 왕씨들의 혼백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비는 수륙재(불교식 천도재)를 지냈고, 권근에게 시켜서 《연화경》(불경) 3부와 37부의 《수륙의문》(水陸儀文, 의례 절차를 정리한 의례서)를 펴내게 했다. 이때 작성된 희생자 명부가 동학사에 전해져 보전되어 내려온 것이다. 왕씨들을 추모하면서 작성된 <초혼기>는 이후 조선 초기에 옥사로 죽은 이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 둘씩 추가해서 늘려온 명부로 단종 복위를 꾀한 집현전 학자들을 거쳐 제8대 예종때 죽은 남이와 강순까지 기록하며 끝난다. 이 명부에 기록된 왕씨는 삼척에서 공양군 왕요 포함 8명[* <동학사 초혼기>는 무안대군 이방번의 장인이라 화를 면한 공양왕의 형 왕우와 그 두 아들을 명단에 포함시키고, 공양왕과 함께 죽은 폐세자 왕석을 빠뜨린 오류가 있어 이걸 빼고 더하면 8명], 거제도에서 수연군 왕규 등 111명, 강화도에서 학성부원군 왕향 등 16명, 도합 135명이다. 《개성 왕씨 대봉보》에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을 감안해도 150여명 선으로 이와 별 차이가 나지 않으며 족보는 정양군 왕우같이 이성계가 보호해 화를 입지 않은 이들까지 이때 죽은 것으로 적는 오류가 있어 이런 이들을 빼고 나면 거의 차이가 없다. 여기에 왕씨에서 떨어져 나간게 거의 확실한 옥씨와 《개성 왕씨 족보》에서도 대거 확인되는 유(柳)씨, 이(李)씨, 여타 외가성으로 개성한 수많은 왕씨들을 감안하면 이상할 것 없다. 외가의 지위가 친가와 동등했던 고려는 외가성을 써서 형제끼리 성이 다른 경우도 꽤 흔했다. 당사자가 모를뿐 왕씨 후손은 지금 개성 왕씨 숫자보다 많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에게 딸을 시집보낸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일가를 보자. 왕씨가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꿨다는 이야기에는 후세의 조작인 경우도 있지만 왕우의 아들들은 일시적으로 노씨로 성을 바꿨음이 《실록》에서 확인된다. 서초패왕 항우가 패망한 이후 유(劉)씨로 성을 갈아버린 [[항백]]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이성계가 직접 구명해줬고 무엇보다 왕씨의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왕씨 성을 유지해야만 했던 왕우의 아들들도 잠깐이니마 왕씨 성을 버리며 숙였는데 방계들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편 개성 왕씨지만 조선 건국에 협력해 2대에 걸쳐 이성계에게 충성한 순흥군 왕승과 맏이 왕강의 집안이 성을 바꿔 남양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거짓이다. 이방원의 공신인 전흥이 왕강의 아들이라는 주장인데 《실록》과 현지 묘비명을 참조하면 왕강과 함께 귀양가 공주에 터잡고 친인척들의 비호를 받아 무사히 대를 이은 왕강의 아우 왕휴와 왕휴의 아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의 존재가 확인된다. 《실록》에서도 유력 왕씨들을 처리한 다음에는 숨어사는 왕씨의 존재가 들통나더라도 적당히 다른 성으로 바꾸게 한 선에서 그친 정황이 확인된다. >[[왕조(고려)|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사람들은〉 [[왕우(고려)|왕우(王瑀)]]의 두 아들인데 외가(外家)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왕조(고려)|노조]]는 고려 왕조의 정강군(定康君)이다. >----- >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12013_001|-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 고려 왕조에서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 >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4월 26일 을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4026_001|-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